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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새시대의 새불교
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깨달음과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한 수행의 방법은 그때와 같을 수는 없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 사회 속에서 사실적으로 신앙하고 수행하기 위해 새롭게 태어난 불교가 바로 원불교입니다.

옛날에는 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깊은 산 속에 있는 절에 가거나, 세속의 모든 인연을 버리고 출가를 해야만 했었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좋다한들 일반 사람들에게는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원불교는 과거의 불교를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쁜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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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1891-1943)
님은 1891년 꽃피는 봄날, 전라북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의 영촌마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여느 아이들 처럼 그도 궁금한 것도 많고 호기심 많은 어린이였지요.

"하늘은 왜 저렇게 파랗고,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세상의 하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은 서로 만나게 되었고, 또 나는 여기에 태어나게 된 것일까?"

하지만 그에게는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 가져봄직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잠시 호기심으로 물어보고 그쳐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답을 얻기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
입니다.
7세 때 푸른 하늘을 보고 시작되었던 물음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시간이 지날 수록 질문은 점점 깊어지고 시름도 커졌습니다. 그리하여 20세가 되던 해 부터는 모든 의문들이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하는 한 생각으로 뭉치게 되었고, 결국은 이 한 생각마저도 넘어서 깊은 명상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 새벽에, 홀연히 한 생각이 떠오르며
20년간 품어왔던 모든 질문들에 대한 큰 깨달음(대각)
을 얻게 되시었으니, 이로부터 새시대 새불교, 원불교의 태동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깨달음을 얻고 그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무지한 농민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방탕하고 나태한 삶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일구고 이타적 삶을 살도록 인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일정의 폭압이 극심하였던 때였고, 또 영촌마을은 외진 궁촌벽지였기에 생활상의 곤궁함은 이로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한 때에 소태산의 깨달음과 새시대를 향한 비전은 희망을 잃고 살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고, 떨치고 일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도록 이끄는 등불이 되었으니, 마침내는 숯장사, 엿장사, 금주금연 운동 등으로 한푼 두푼 모은 성금을 기반으로 하여, 황무지나 다름없이 버려져있던 간석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든 방언공사까지 이루게 됩니다.
소태산 대종사와 아홉 제자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가운데 이러한 역사를 이루어 냈으니, 이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과 별개가 아니라, 마음공부를 잘 하면 세속의 삶도 보다 윤택해지고, 일상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수행도 함께 하는 것이라는
새시대 새종교의 가르침을 말과 글이 아닌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셨던 것
이었습니다.
자비방편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은, 1943년 6월 1일에 열반에 드실 때 까지 28년간 이어졌으며, 그의 깨달음과 자비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전해져서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인류의 정신문명을 향도하는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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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

: 진리의 사진

일원상(一圓相)은 곧 우주에 편만한 진리를 도형으로 표현한 것

입니다. 이 자리를 다른 말로는 법신불이라고도 하고, 일원, 하나님, 하느님, 알라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럼 이 일원이란 무엇일까요? 소태산 대종사님의 일원상 서원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원은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묵상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자리이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지만 형상이 있고 없는 모든 것들이 이로부터 나오고 또 이곳으로 돌아가나니,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네가지 은혜가 나오는 근원이요, 모든 깨달으신 성자와 영적인 스승으로부터 보통의 사람들과 미물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이를 닮아있습니다.
이 일원은 변함이 없다고도 할 수 있고, 한없이 변화한다고도 할 수 있으니, 변함이 없다는 것은 무엇으로 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요,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태초 이전부터 이미 스스로 존재하며, 그 한결 같은 모습 가운데 이로부터 한 없는 세계가 나오는 것을 이름이요, 한없이 변화한다고 하는 뜻은 우주의 생성되고 잠시 머물다 허물어지고 없어지는 이치와, 만물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게되는 이치와, 태.란.습.화로 세상에 나는 중생들의 몸과 마음을 쓰는 그 씀씀이에 따라 여섯가지 다른 모습으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이 되고 혹은 강급이 되며, 혹은 해로운 것에서 은혜가 나오기도 하고, 혹은 은혜 가운데 해로운 것이 나오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한없는 세상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부처님의 몸을 본따서 만든 조형물을 만들어 이를 숭배했다면, 원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마음을 바로 이 일원상으로 상징
하고, 우리들도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자비행을 닮기 위한 표본으로 모시고 신앙, 수행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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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

: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네가지 큰 은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네가지 은혜

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
의 네가지 은혜입니다. 혹 어떤 이는 이러한 은혜에 대해 그저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게 무슨 은혜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이 사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다 인정하면서도, 언제나 함께 해왔기에, 또 앞으로도 이러한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함부로해도 되는 것 또는 그저 내가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소중한 것은 그것이 사라진 뒤에야 고마움을 알게되듯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면서야 뒤늦게 그 크신 사랑을 깨닫고 후회하게 되듯이,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것

이지요.


오늘날 우리 인류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은혜를 알지 못하고 배은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환경 파괴로 인한 공해와 인류의 생존까지도 위협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 현상. 가족과 이웃간의 사랑과 배려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헐뜯고 다치게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정의가 서지 못하고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사회.

이 모두가 은혜를 알지 못한고 보은하지 아니한 까닭

입니다.


사은의 지중한 은혜를 깨닫고 함께 보은하며 살아갈 때에, 마침내 반목과 투쟁도 사라지고,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사회, 국가, 세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삼학

: 원만한 수행을 위한 세가지 공부

삼학이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세가지 공부

로, 이는 우리들에게 내재된 불성(부처님의 성품)을 깨닫고 이를 발현하기 위한 수행의 길입니다.


정신수양이란
마음의 힘을 갖추는 공부
로, 좋고 싫고, 기쁘고 슬픈 여러가지 경계와 환경의 변화 속에서, 거기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힘, 곧 수양력을 기르기 위한 공부입니다. 염불과 좌선, 기도 등의 수행이 이에 해당합니다.


사리연구란
마음의 지혜를 갖추는 공부
로, 어리석은 마음을 놓고 바른 지혜를 갖추어 사물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힘, 곧 연구력을 기르기 위한 공부입니다.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 등의 수행을 통해 지혜의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작업취사란
마음먹은 것을 실제 행동으로 나투는 실천력을 갖추는 공부
로, 해야하는 일은 하고, 하지말아야하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곧 취사력을 기르기 위한 공부입니다. 상시일기, 주의, 조행 등의 수행을 통해 습관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의 인지가 발달하지 못했고, 또한 사회 환경적인 요인으로 제약이 많아 삼학을 함께 수행하지 못하고, 각각의 공부를 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가지 공부는 솥의 세 발처럼,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온전히 활용할 수 없습니다. 세가지 공부, 삼학을 함께 수행해 나감으로써 부처님과 같은 원만한 인격과 자비행을 갖출 수 있습니다.



원불교의 교리에 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원불교 교전을 참고하시고 가까운 교당을 방문하시어 교무님과 상담하시기 바랍니다.